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(문단 편집) ==== 육군의 폭주 ==== 물론 육군도 얌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노구교 사건 발생 직후 무토 아키라를 비롯한 확대파들은 "유쾌한 일이 일어났다"고 외치면서 즉각 확전을 기도했다. [[이시와라 간지]] 등은 대소련 군비를 완성해 국방을 다질 때이며 국민정부는 이미 과거의 오합지졸 중국이 아니라고 확전에 반대했으나 무토 등은 상관인 이시와라의 판단에 정면으로 저항,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. >지나는 통일 불가능한 분열적 약국으로 일본이 강경한 태도를 내보이면 즉시 굴종한다. 이때 지나를 굴복시켜 대체로 북지나 5성을 일본의 세력 하에 넣어 만주와 더불어 대 소련 전략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. 노구교 사건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 바랄 나위 없는 좋은 기회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이다. 이 사건은 낙관을 허용하지 않는다. 이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. 거기에는 북지나에 병력을 증파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잃지 않고 일격을 더한다. 이것에 의해서만이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. >---- >무토 아키라,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 회상록 결국 이시와라는 확대파들의 하극상 끝에 쫓겨났는데 과거 이시와라 간지가 [[만주사변]]이라는 초대형 하극상으로 영전했던 걸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었다. 결국 육군의 중견층은 무토 아키라의 확대론을 내세우며 역시 폭주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